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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dilmun 2020. 2. 2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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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웡 23일 밤 11시 15분에 방송되는 EBS 한국영화특선에서는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주연의 영화 <사도>가 방영될 예정인데요, 이 영화는 2015년 9월 16일 개봉된 영화로 영화 <왕의 남자>, <황산벌>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감독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로 알려진 이 사건은 국민 배우 송강호와 영화 '베테랑'에서 악역을 연기해 유명해진 유아인이 만나 영화 '사도'를 통해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재조명합니다.

 

 

 

 

영화 사도 줄거리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된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가 시작된다.

 

https://youtu.be/y-sqDi4cgdI

 

이준익 감독은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도'의 가족사에 집중하여, 어떤 순간에도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세자 '사도'의 이야기를 조선역사에 기록된 가장 비극적 가족사로 풀어냈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사도'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게 된 계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연,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심리를 따라가면서 '영조'와 '사도'의 갈등에 관객들이 공감하고 사극을 가깝게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밝혔습니다.

 

 

 

'영조'역을 맡은 송강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사상 처음 왕으로 변신해 조선시대 증흥기를 이끈 성군이지만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아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되는 아버지 '영조'의 복합적인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해냈습니다.

송강호는 '영조'는 한 나라의 군주이기도 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기에 '영조'의 고뇌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영조'의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연기를 하다 보니, 외형은 물론이고 호흡 하나, 목소리 하나, 걸음걸이 하나에도 신경 써야 밝혔습니다.

 

 

 

<완득이><배테랑>등의 작품을 통해 개성 있는 마스크와 호소력 있는 연기력을 선보인 유아인은 강압적인 아버지 '영조'와 갈등하며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사도세자'역을 맡았습니다. 그는'사도세자' 그 자체가 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송강호라는 인물이 '영조'를 연기하는데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매 순간, 단 일초도 '영조'가 아닌 적이 없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유아인을 머릿 속에 떠올렸다. 영화를 찍을 때도 연기 디렉션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질 자체가 이미 '사도'였다."며 배우들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문근영은 <사도>에서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역을 맡아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외면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해냈습니다.

한편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에 총명하고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조와 생모 있의 친절한 훈육을 받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이 도탑지 못하였으며 이로인해 여러 문제를 낳았습니다.

이후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와 법모 정성왕후가 연이어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도 또한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이는 등 정신병 증세로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 민백상, 이후 등 사도세자의 보호론계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고,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습니다.

1762년에는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하여, 결국에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론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의 방식으로 세자를 폐위하였습니다. 임오화변의 결과, 공석이 된 동궁의 지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이 계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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