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역사이야기

김원봉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노덕술

dilmun 2020. 2. 16.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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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을 국군의 뿌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한국광복군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창설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 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습니다.

 

 

광복군은 창설 1년여 만에 3백 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했고 1942년 5월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으로 편입 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 또는 조선항일의용군은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에서 결성된 독립군입니다.

 

 

 

김원봉은 1898년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장, 광복구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고 1958년 북한에서 세상을 떠난 독랍군입니다.

김원봉은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이 강하여 반일 행동을 하다가 학교를 중퇴했고, 20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습니다. 의열단은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직 무장투쟁뿐이라는 신조를 가진 젊은이들의 조직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서(부산, 밀양, 종로), 동양척식회사, 일본 왕궁 폭탄 투척,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 사건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무장투쟁과 테러를 들고 나온 의열단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현삼금도 김구가 60만원, 김원봉이 100만원을 할 정도로 일본은 김원봉울 잡기 위해 혈안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일본 관헌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두 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고, 잠은 다섯 명의 동지집에서 돌아가면서 잘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혁명활동 27년 동안 한 번도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김원봉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한 독립투사 중 한 사람으로 그가 이끄는 의열단은 한, 중, 일 삼국을 무대로 일본인과 일제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총탄을 발사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김원봉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의열단을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갔는데요, 그것은 그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음을 의미합니다. 김원봉은 라이벌일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맞지 않는 김구와의 통합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임시정부 및 광복군으로 기꺼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좌우합작과 통합의 정신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홥니다.

김원봉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라이벌 김구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야심을 접을 수도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원봉은 월북으로 인하여 정치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는데요, 당시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세력과 미군정 하에서 익산의 선택지는 거의 없었고 특히 1947년 7월 19일에 약산의 정치적 멘토라고 할 수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대낮 암살사건은 약산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멘토였던 여운형 선생이 피살되자 약산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또한 친일파 악질 경찰 노덕술에게는 굉장한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김원봉은 오히려 광복된 나라에서 그것도 친일파 경찰에게 구타와 수모를 당하면서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처참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미군정으로부터도 수배령이 내려지면서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결국 쫓겨 가다시피 해서 월북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항상 좌우 세력의 단합과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았고, 광복 이후에도 남북이 하나되게 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다했는데 오히려 친일파 세력에 의해 월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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