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 6.25 한국전쟁70주년 김일성과 스탈린

dilmun 2020. 5. 5.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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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이라고 불리우는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반발한 전쟁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여 60만 9천 여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이 사망저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https://band.us/page/73695553/post/632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암호명 ‘폭풍’과 함께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의 기습 남침이 시작됩니�

KBS 역사저널 그날 : BAND Page

band.us

 

 

 

또한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는데요,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5월 5일 밤 10시에 방송되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70주년 1부 6. 25 개전 시나리오-김일성, 스탈린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6.25전쟁과 관련된 스토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시작은 1949년 3월 4일 김일성이 모스크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스탈린은 김일성이 제안한 '남침'을 반대하고 '정의의 반공격'을 제안했습니다.

스탈린은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 노동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스탈린은 전 세계 공산화에 대한 야욕이 있었지만 김일성의 제안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김일성에게 정의의 반공격을 제안한 것입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이 남한에 비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않았고 수적으로 열세다. 또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있기 때문에 시기상조다. 적들이 만약 침략 의도가 있다면 남한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라며 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길것이고 그때 공격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여 1950년 4월 10일 스탈린으로 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고 소련의 지원하에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문화 및 경제 관계 조약과 더불어 비밀 군사원조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비밀 군사원조협정에 의해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밖에도 100명이 넘는 소련 군사고문단을 1년 예정으로 북한에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 첫 그룹이 1949년 5월 북한에 도착했으며 북한군의 전력 증강은 1949년과 1950년에 걸친 겨울에 계속됐습니다.

 

 



1950년 봄에 소련으로부터 북한으로 무기 공수가 대대적으로 증가했으며. 소련은 인민군 1개 사단에 소련 장교 15명씩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180대의 군용기,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타이거 전차를 격파하는 데 전공을 세운 T-34형 전차 300대, 야포와 자동화기 등 다량의 현대 무기를 북한으로 반입했습니다. 북한은 일제가 북한 지역에 건설해 놓았던 수많은 기계, 화학공장 덕분에 북한제 국산총인 따발총(多發銃)과 해안경비정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했습니다.

반면에 미국이 6‧25 전까지 한국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해군 소해정 30여 척, 연락기(L-5형) 10대에 그쳤습니다. 한국 국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10대의 훈련기(T-6)를 구매하려는 우리 정부의 판매요구를 거절하여 결국 캐나다로부터 구입했습니다. 그 결과 6‧25 발발 당시 육군의 장비는 장갑차 27대, 57㎜ 무반동총 140정, 2.36인치 로켓포 1900문, 구형 105㎜ 야포 91문이었습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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