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역사이야기

동학농민운동과 녹두장군 전봉준 황토현 전투

dilmun 2020. 5. 3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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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음력 1월 10일의 고부농민봉기로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895년 음력 3월에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처형당함으로써 종결된 운동인데요, 이 운동은 1년 이상의 장기간에 거쳐 수백 만 민중들이 참여한 민중봉기였습니다.

5월 31일 밤 9시 10분에 방송되는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응답하라 1894> 두 번째 탐사 여행편으로 동학농민군의 혁명로드를 따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했던 탐관오리 끝판왕 조병갑과 이용태 등 이들의 만행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또한 탐관오리 빌런에 맞서기 위해 똘똘 뭉친 조선판 어벤저스 '농민히어로들' 캡틴 코리아 전봉준부터 손화중, 김개남까지 든든한 세 명의 지도자들 덕분에 당시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1892년(고종 29)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는 반면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병학은 오히려 전창혁에게 심한 매질을 가해 버렸고 전창혁은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고종 30)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농민들은 전라북도 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역시 대답을 받지 못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500&code=kc_age_40

 

우리역사넷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렸던 고종 집권 초기 조선은 각종 사회혼란과 정부권력자들의 무능 그리고 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부군 군��

contents.history.go.kr

https://tv.naver.com/v/14025234

 

[선공개] '동학농민혁명' 녹두 장군의 탄생? 전봉준 비긴즈!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 [선공개] '동학농민혁명' 녹두 장군의 탄생? 전봉준 비긴즈!

tv.naver.com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는 1894년(고종 31)2월 15일(움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습니다. 동학군은 최초의 전투였던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요, 이 전투는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과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 후에 금주,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집결한 농민들과 합세하여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4월 6일 태인 인근 화호 나루 일대에서 첫 접전이 이루어졌을 때 농민군은 패주하는 척 하였다고 합니다.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하였고, 농민군은 정읍 화토현에 진을 쳤습니다. 관군도 황토현 부근에 진을 쳤는데요, 농민군은 4월 7일 새벽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쳐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주시켰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리라고 추정하는 곳에서 철종 6년인 1855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준, 자는 명숙, 봉준은 아명입니다. 녹두라는 별명은 키가 작아 녹두라는 별명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황토현 전투는 동학혁명의 불길을 나라 전역으로 번지게 한 전투로 황토현의 지대는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고개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고 지리에 밝은 전봉준과 동학의 지도자들은 4월 7일 화호나루에 있는 감영군을 백산 쪽에서부터 유인했습니다. 부안 쪽으로, 평교리로, 고부로, 잡힐 듯 잡힐 듯 도망가는 농민군들을 좇기에 지친 감영군들은 그날 밤, 술에 취한 채 잠들었습니다.

그 사이 봉홧불이 오르고, 북소리가 등둥 울렸습니다. 총을 쏘고 포를 쏘면서 관군들을 물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군은 이 전투에서 영관 이경호를 죽이고, 감영군 482명을 죽였습니다. 농민군의 사망자수는 6명의 불과했습니다.

농민군이 크게 이긴 황토현 고갯마루에는 1960년대 세운 동학농민기념탑이 남아있습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그 당시 민중들이 불렀던 '파랑새요'가 새겨져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보리’라는 글 속에 그 당시 농민들의 절절한 바람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후 기관총을 가진 일본군과 관군에 의헤 쓰러져가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전투에 패하자 동학군을 해산했습니다. 전봉준은 입암산을 거쳐 순창군 쌍지면 피노리로 피신하였는데, 부하접주 김경천의 고발로 다리가 부러진 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재판을 받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5년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레 봄비가 주절주절 내리는 가운데, 그의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생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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