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역사이야기

서오릉 명릉(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dilmun 2020. 4. 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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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하고 있는 서오능은 5개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릉, 창릉, 익릉, 홍릉, 명릉등 조선 왕실의 왕릉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그 중 명릉은 19대 임금인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가 안장되어 있는 능입니다.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곳에 위치한 대빈묘는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8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4월 12일 밤 9시 5분에 방송되는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불꽃남자 숙종과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이야기를 따라 선녀들이 경복궁 서쪽 다섯 개의 능, 서오릉 안 명릉을 찾아 지난주에 이어 숙종탐사 2편으로 꾸며질 예정입니다.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은 인경왕후였는데요, 인경왕후는 1680년 20세 때 천연두로 요절하였습니다. 이후 1681년에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았습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어려서부터 노는 것이 예사 아이들과 아주 달랐고, 남과 더불어 겨루거나 다투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을 들어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누가 남의 시비를 논하는 일이 있어도 문득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가 되어서도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20대 후반이 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장희빈은 왕실의 기대대로 왕자를 출산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온갖 교태와 계략으로 숙종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으며, 또한 인현왕후를 중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중상모략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결국 숙종 21년 5월2일 인현왕후는 투기로 인해 간특한 계략을 꾸몄다는 이유로 폐서인되고 말았습니다.

 

 

 

인현왕후는 5년간의 모진 세월을 보낸 후 마침내 복위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통과 구토의 증세가 찾아왔고, 또한 옆구리 부위에 웬 덩어리도 생겨 있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내의원으로 하여금 극진히 치료하도록 명했고 다행히 복통과 구토의 증세는 조금씩 호전되어 갔습니다.

인현왕후는 6년 후 또다시 병이 찾아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양쪽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 참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며,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져져서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고통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뒤이어 경련 증세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다리에 경련이 일다가 전신으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인현왕후는 1년 가량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며 오심, 구토, 복통, 설사, 발열로 고통받았으며, 그러다 결국 소변이 막히고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는 등 상황이 악화되어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2시경 별세했습니다.

숙종은 그녀의 능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승하한 후 그 곁에 묻혔습니다. 일반적으로 원비인 인경왕후와 묻히는 게 원칙이지만 숙종이 그러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이후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무덤도 바로 옆에 지었는데 이를 명릉이라고 하여,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중 하나입니다.

 

 

 

명릉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있고, 인원 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입니다.

한편 인현왕후전에서는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초상화에 화살을 쏘아 저주했으며, 이로 인해서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실제로 장희빈은 이 때문에 사약을 받은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병을 얻게 된 이유는 폐비가 되었을 겪었던 몸 고생, 마음 고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인현왕후는 폐비 시절의 힘든 생활 때문에 결핵성 질환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그 후로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현왕후는 사가 시절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자책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등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인현왕후는 질투나 분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참고 삭히는 성품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이 때문에 병을 얻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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