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 대구10월 사건(10월항쟁)

dilmun 2020. 2. 18.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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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항쟁 또는 대구 10.1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를 말하고 있는데요, 2월 18일 밤 10시에 방송되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74년간 우리 역사에서 잊힌 대구 10월 사건을 조명한다고 합니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일제에 협력하며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재탄생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람들은 또다시 경찰의 강압적인 쌀 공출에 시달리며 배를 곯아야 했습니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쌀이 아닌 경찰의 총탄이었습니다. 우리 기억에서 지워진 대구의 '그날'과 미군정, 그리고 친일 경찰의 연결고리를 역사저널 그날에서 살펴본다고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10월 1일의 경찰 발포였습니다. 경찰의 총격에 시위 군중 명이 사망했는데요, 사망자는 대팔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20세 안팎의 청년 황팔용 이었습니다. 10월 2일 아침 대구의전(경북대 의대 전신)학생 수십 명이 그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대구경찰서에 나타났습니다.

 

 

 

시위대 일부는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고 수감자 100명을 석방했습니다. 학생대표단은 미군정을 상대로 "구금자 석방, 경찰의 무장해제, 대중 발포와 폭력진압 중지"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으며, 미군정 측 담당자가 이를 수용하자 학교에 돌아갔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 지도자 중 일부는 시민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미군의 명령을 받은 경찰 150명이 다수의 군중이 모인 대구역 인근에 출동하며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의 총격으로 민간이 17명(또는18명) 경찰 4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어 미전술군이 투입되었습니다. 미군은 전차 4대와 기관총부대가 출동하여 군중에게 해산하라고 명령했으며 학생대표와 미군이 협상을 통해 군중 해산에 동의 했습니다.

 

 

 

미군의 출동과 계엄령 선포로 대구 시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폭발하기 시작한 인민들의 항쟁은 대구 주변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구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일반시민, 다수의 군정관리, 의사,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민군정, 친일파, 친미세력, 일부 작산계급을 제외하고 전민중이 참여하였습니다.

 

 

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요구는 계층에 따라 다양하고 중첩적이었습니다. 부녀자들은 쌀을요구하며 대구부(시)청에 난입했고, 노동자는 파업과 조직적인 행동을 통해 임금과 수당의 인상, 쌀배급 증대,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등 일상적인 생활난을 호소했으며,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 금지와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대구항쟁이 일어나게된 배경에는 친일파 처단, 미군정의 반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 경제적 불만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저항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경찰은 일제시기의 일제의 앞잡이로, 미군정 아래서는 미군정의 앞잡이로 행동함으로써 민중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미 군정청은 일제청산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들을 요직에 승진까지 시켜줌으로 미군의 대한 원성도 컸습니다.

 

 

 

국민은 일제로부터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한 토지개혁을 제창했지만 식량공급정책을 더욱 강압적으로 시행했던 미군정에 저항감을 가졌습니다.

주한미군의 '대구 10월사건' 결과에 대한 정보보고서(G-2)에 의하면 희생자가 대구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1천여명, 행방불명 30명, 시위혐의자 7천400여명으로 발표했지만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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